사랑
무더운 여름에도 연인들이 서로 손을 잡고 있었던 이유
밸런스 게임을 하던 중 흥미로운 질문을 받았다. “애인이 육체적 바람 피기 vs 정신적 바람피기”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반반으로 나눠졌다. 술과 함께하는 열띤 토론은 좀처럼 식을 줄 몰랐다. 어느 한쪽도 쉽게 선택할 수 없어서 이 질문을 조금 다른 방면에서 생각해봤다. “육체적 관계가 없으면 사랑은 불가능한가?” 혹은 “육체적 관계만으론 사랑이 이루어 질 순 없는가?”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고, 그렇게 술자리가 끝났다. 집으로 오는 길에 다정히 손을 잡고 길을 걷는 커플을 보았다. 30도가 넘는 무더위에도 손을 놓지 않는 그들의 사랑에 감탄하며 다시 질문에 꼬리가 물리기 시작했다. 커플들은 왜 항상 손을 잡고 걸을까. 손을 잡지 않으면, 목줄 없이하는 강아지 산책 같아서 애인이 도망이라도 가는 것일까? 아님 손을 잡는 가벼운 스킨쉽조차 그들에겐 소중한 것일까?
고대 그리스에선 성적인 사랑을 뜻하는 “에로스”, 우정을 뜻하는 “필리아” 그리고 순수한 사랑인 “아가페” 이렇게 세 가지로 사랑을 분류했다. 플라톤은 그의 저서인 ‘향연’에서 에로스와 관련된 여러 견해를 소개한다. 그 중 소크라테스의 견해와, 아리스토파네스의 견해를 소개하도록 하겠다.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처음 사랑에 빠지는 이유는 ‘아름다움’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어리고 미성숙한 단계에서의 아름다움은 다른 이성의 몸에 대한 아름다움이다. 성숙해지면서 단순한 몸의 아름다움에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체의 아름다움에 욕망한다. 또한 취향이 생기면서 구체적인 아름다움을 욕망한다. 하지만 이 단계마저도 미성숙한 단계이다. 가장 성숙한 단계는 구체적인 아름다움이 아닌 아름다움 그 자체를 욕망한다. 그렇기 때문에 플라톤에게는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자의 사랑’이 가장 이상적인 사랑이었다.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는 설화로 사랑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본래 인간은 두 개의 머리, 4개의 팔, 4개의 다리로 이루어진 완벽한 몸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너무나 완벽한 나머지 신에게 도전하여 신의 분노를 사게되었다. 신의 분노로 몸이 반으로 나눠진 인간은 평생 자신의 반쪽을 찾아다녀야 했다.” 이 짧은 얘기를 통해 아리스토파네스는 사람들이 왜 성적 충동을 느끼는지 설명한다. 또한 인간이 느끼는 욕구 또한 단순히 번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의 완성하고자 하는 형이상학적인 욕망이라 설명한다.
쇼펜하우어의 가족관계는 좋지 않았다. 사업가였던 아버지는 창고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었고, 예술가였던 젊은 어머니는 아버지의 돈으로 파티만 즐겼다. 아버지의 장례가 마무리되자 어머니는 그의 여동생만을 데리고 떠난다. 홀로 남겨진 그는 아버지의 사업을 정리 후 유럽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철학을 전공한다.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그의 불운한 유년시절 탓인지 삶을 비관적인 태도로 바라보고 있다. 사랑을 아름답게 표현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과 달리 쇼펜하우어는 남녀간의 사랑은 성욕 때문에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또한 성욕은 우리의 모든 행위를 가장 활동적으로 만들어주는 요소이자, 가장 강한 욕구라고 생각했다. 그의 저서를 통해 성욕이 가장 강한 욕구인 이유를 설명한다.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은 ‘종족 번식’이란 강한 본능을 가지고 있다. 이런 본능을 가지고 있는지 인지조차 못할 수 있지만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는 종의 재생산을 위한 의지를 갖고 있다. 살아 있기 때문에 종족 번식에 대한 의지를 가질 수 있는 것이고, 그 의지를 실행시키기 위해 성욕이 발생하는 것이다. 즉 성욕은 단순한 욕구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루고자 하는 의지 그 자체이다.
그의 저서에서는 사랑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해서도 얘기한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을 이기적인 존재로 바라보았다. 이기심은 이성 간에 사랑에서 두드러진다. 이기적인 사랑은 자신이 주는만큼 상대방에게 받아야 유지된다. 그래서 사랑을 할 때는 끊임 없이 상대방의 사랑을 확인하고자 한다. 자신이 주는만큼 상대에게서 보답 받지 못한다면 상대를 육체적으로라도 소유하고 싶어한다.
플라톤과 소크라테스는 사랑이란 순수한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쇼펜하우어는 사랑이 성적 충동의 부산물이라 생각했다. 17세기 영국 상류사회에선 ‘플라토닉 러브’란 단어가 다양한 예술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예술에서 시작된 작은 바람은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플라토닉 러브만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열풍이 불었다. 영국 귀족들은 육체적인 욕망에 이끌려 사랑하는 것은 하층민들이나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21세기엔 반대로 흘러가고 있다.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사랑을 하는 것에 지친 사람들은 점점 성적 욕망에 충실해져 간다. 연인이 아닌 파트너의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의 성적 욕구만을 충족시켜 주거나, ‘선(先)섹(sex)후(後)사(사귀다)’란 단어를 만들며 상대방이 자신의 성적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지부터 확인한다. 무더운 여름에도 연인들이 서로 손을 잡고 있었던 이유는 서로의 성적 욕구를 채워줌과 동시에, 더위에도 손을 놓치지 않는 모습을 통해, 자신의 이기심이 꺾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였을까 생각해본다. 당신은 현재 어떠한 사랑을 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