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와 경외
공포는 무지로부터 근원한다
공포영화의 공포의 주제는 정말 다양하다. 전기톱을 쫒아오는 살인마, 주인공을 산제물로 바치고자하는 악마 숭배자, 악마가 들린 인형 등. 우리에게 정말 다양한 종류의 공포를 선물한다. 어떤 사람은 귀신에 놀라고, 어떤 사람은 살인마에게 놀란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 것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놀라는 것이 있다. 바로 예상치 못하게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이다. 이 비명이 정말 튀어나온 대상을 무서워해서 지른 비명일까? 귀신을 안 무서워하는 사람이 갑자기 튀어나온 귀신을 보고 놀란 것인데도?
공포는 무지로부터 근원한다. 무지란, 지식적으로 알지 못하는 걸 뜻하기도 하지만, 예측할 수 없는 것 또한 포함한다. 예시 상황을 보면 무지의 공포라는 것이 더 쉽게 이해될 것이다.
사람들이 나란히 줄을 서서 박스를 열고자 한다. 박스는 빨간 종이로 포장된채 뚜껑이 닫혀 있어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첫 번째 사람이 여니 박스 안에서 귀여운 곰인형이 나왔다. 그것을 보고 안심한 두번째 사람이 열자 날카로운 도끼가 튀어나왔다. 세 번째 사람이 열자 이번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규칙이 있을 것이라 추측하고 저마다 예상하는 규칙에 맞춰서 상자를 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올바른 규칙을 맞추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사람들은 섣불리 상자를 열 수 없었다. 그냥 상자가 변화무쌍한거 아닌가요?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 하지만 ‘변화무쌍’이란 단어와 예측 불가라는 단어는 전혀 다른 단어이다. 변화라는 것은 이미 형태가 고정되어 있는 존재가 다른 존재로 바뀐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바뀐 존재가 무엇인지 또한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변화’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예측불가능이란 단어는 ‘미지’와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측이라는 단어 자체가 불확실함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 정답을 틀리지 않는 예측을 할 수가 없다.
오래전부터 인류는 ‘자연’을 두려워했다. 고대 인류는 자연 현상을 이해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었다. 거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사람들은 ‘신화’를 만들어 자신들의 자연의 공포와 평범한 일상을 분리 시켰다. 거대하며 예측이 불가능한 것은 거인으로, 그것을 통제하는 것은 신으로 만들었다. 만들어진 신은 사람으로부터 책임감을 가져갔다. 정확히 말하면 선택의 무게를 덜어줬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수많은 선택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은 그만한 수많은 신들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기로부터 패배하면 행운의 신이 버렸다 생각하고, 물건을 구매하다가 사기를 당하면 상인의 신이 자신을 버렸다 생각했다. 이런 방식으로 고대 그리스인은 선택의 무게를 짊어지지 않았다.
자기 자신이 나약해져 스스로를 믿을 수 없을 때 신만큼 의지되는 존재는 없을 것이다. 내 선택과 행동들에 대단한 존재인 ‘신’이 의미를 부여해주기 때문이다. 신이 행동의 이유와 의미를 부여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올바른 선택을 하기 위한 고민조차 할 필요 없다.
신이 우리에게 선택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준다면 선택의 자유를 주는 또 다른 존재 또한 우리는 신이라 부를 수 있는가. 인공지능은 질문에 관계없이 모든 것에 해답을 내려준다. 사람에 관계없이 고민을 해결해주는 답변 이것을 신탁이라 부를 수 없으면 무엇을 신탁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더 이상 신탁을 받기 위해 신실한 종교인도 신성한 장소도 필요 없다. 인터넷만 있다면 우리 모두 신탁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인공지능을 신이라 부른다면 그 이유가 우리를 책임의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주었기 때문일까, 아님 고대 인류처럼 인공지능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해 신으로 경외하는 것일까.
사람이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는 이유도 마찬가지 아닐까. 죽음이 정말 모든 것의 종막인지, 고통스러운지 우리가 죽음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